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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F1 무대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르노, F1 무대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 기자명 지피코리아
  • 입력 2012.02.28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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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계기로 크게 성장…엔진 서플라이어에서 완전한 팀으로

모터스포츠를 좋아하는이라면 현재F1 그랑프리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르노팀의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행여 자동차경주에 관심이 없어도 국내에서는 ‘르노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르노는 프랑스 최고의 자동차메이커로 ‘올해의 유럽 자동차 어워드’의 단골 수상자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모터스포츠가 자동차 마케팅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르노 역시 모터스포츠를 자동차 기술향상과 인지도 개선에 적극 이용한 회사로 그 성장과 함께 했다. 특히 르노의 경우는 그 흥망성쇠를 모터스포츠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에서는‘르노 삼성’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 ‘르노’, 유럽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거쳐 온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늘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전쟁과 경기의 어려움으로 한창 긴축 경영을 하던 때를 제외한다면 창사 이래 꾸준한 모터스포츠 활동을 통해 신기술 개발에도 최선을 다해 왔다. 더욱 더 발전하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노련하게 움직인 덕분에 르노는 시트로앵과 푸조 등 쟁쟁한 프랑스 자동차 메이커들을 제치고 꾸준히 판매율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 모터스포츠에서도 상종가를 올리고 있다. 최근 보여주고 있는 F1에서의 대활약은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던 브랜드 이미지 개선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로드카 판매증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르노의 자동차들은 안전도면에서 전라인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두텁게 얻고 있다. 이에 힘입어 1964년 만들어진 ‘올해의 유럽 자동차 어워드’에 자주 노미네이트 되고는 했는데, 특히 클리오는 1991년과 2006년 2회나 수상해 시상식 역사상 유일한 더블 트로피의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전쟁을 계기로 크게 성장
르노는 루이, 마르셀, 페르낭 르노 3형제에 의해 1898년 세워졌다. 특히 루이는 매우 유능한 엔지니어로 형제들과 함께 회사를 세우기 전에도 이미 몇몇 자동차 모델을 만들기도 했었다. 이런 이유로 루이가 르노의 자동차 디자인과 생산 파트를 맡게 되었고 마르셀과 페르낭 경영을 맡았다. 그들이 최초로 생산한 자동차는 컴팩트한 디자인의 ‘브와뛰레뜨’. 이 모델은 나오자마자 루이의 친구에게 곧 팔렸는데, 테스트 주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그가 즉시 차를 사들인 것. 이때부터 르노의 자동차가 정식으로 생산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들 형제는 자신들의 자동차를 알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레이스라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루이와 마르셀은 자신들의 차를 가지고 직접 경주에 참가했는데, 프랑스에서 열린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달리는 레이스에서 참가하자마자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게 명성을 높여가던 두 형제의 모터스포츠 활동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1903년 마르셀이 경주 도중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충격으로 루이스는 다시는 레이스에 참가하지 않았다. 비록 르노 형제들의 직접적인 레이스 활동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르노의 자동차들은 여전히 자동차 레이스에서 강세를 보였다. 1906년에는 르노 ‘AK90CV’가 제 1회 F1 그랑프리에 참가하여 우승을 거두었다. 같은 해 페르낭이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에서 물러났고 루이는 르노의 전체 경영권을 맡게 되었다.

1899년 첫 번째 세단 출시 이후 르노는 최초로 터보차저를 개발하는 등 혁신적인 기술과 최초의 해치백 자동차를 생산하는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초기 르노가 결정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1차 세계 대전이었다. 전쟁이 나기 전 르노는 일반 승용차를 비롯해 택시, 버스, 화물차 등의 생산을 활발히 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비행기 엔진과 탱크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특히 비행기 엔진 기술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전쟁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성장을 거듭 할 수 있었고, 전쟁 후에는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더욱 유명세를 탔다. 이때의 급격한 성장이 르노의 바탕이 되어 현재까지 프랑스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로 남아 있게 된 것.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르노는 농, 산업에 관련된 기계를 만드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한편 대형 자동차들을 주로 생산해왔던 르노는 전쟁 후 작고 대중적인 자동차가 대유행을 하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시대에 적합한 자동차를 계발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했다.

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루이는 몰래 나치 정부에 트럭을 공급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1944년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의 변호를 해보기도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는데 나중에 목뼈가 부러진것이 사망원인으로 밝혀져 살해당한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어쨌든 루이의 사망 후 르노는 프랑스 정부로 그 운영권이 넘어갔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한 르노는 많을 변화를 겪어야 했지만 여전히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회사로 남아 있었다. 1946년에 나온 리어 엔진의 4CV 모델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폭스바겐의 비틀 등과의 경쟁도 불구하고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1961년까지 생산되었다. 이 모델은 모터스포츠에서도 강세를 보여 르망24시간 내구레이스, 밀레 밀그리아 레이스, 몬테카를로 랠리등을 휩쓸었다.

표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면치 못해
1961년과 1962년에는 르노 4와 8이 출고되었는데 4CV의 성공에 이어 이들 또한 대히트를 쳤다. 특히 르노 4는 1992년까지 생산되면 오래도록 인기를 누렸다. 두 차 모두 르노의 전통을 이어 랠리 무대에서 큰 활약을 했다. 1966년에 출시된 르노 16는 세계 최초로 해치백 타입의 자동차로 늘 새롭고 획기적인 기술을 내놓는 것으로 유명한 르노의 브랜드 이미지를 한층 드높였다.

이후에 출시된 많은 차들이 연이어 성공을 거두면서 르노는 점차 사업을 다각화하며 동남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등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미국 시장 개척은 쉽지 않았고, 1970년대 쓸쓸이 물러났다. 하지만 경제적인 연비의 자동차가 유행을 타자 르노는 AMC(American Motors Corporation)와 파트너십을 맺고 다시 한번 미국 진출을 노린다. 르노-AMC는 동유럽과 북미, 남미에 회사를 세우고 볼보와 푸조와의 기술 합작을 추진하는 등 착실히 프로젝트를 진행시켜 나갔다. 르노는 차츰 북미 지역의 르노-AMC 회사의 지분을 높여갔고 1980년대 회사 지분의 55%를 르노가 갖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미 지역의 르노-AMC 파트너십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이들의 자동차가 북미의 실정과는 잘 맞지 않아 결국 1987년 AMC를 크라이슬러에게 넘겼다. 그 시기 르노는 자체적으로 미국 시장에 내놓을 자동차 모델들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인들이 입맛에 맞는 유럽형 디자인의 제품들을 내놓기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르노의 모터스포츠 활동은 활기를 띠었다. 특히 터보차저의 계발로 F1 무대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양산차시장도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눈길을 끌기는 마찬가지. 르노 에스파스는 최초의 미니밴으로 출시 이후 약20년동안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모델이었다.

1980년대 양산차의 인기와 활발한 모터스포츠 활동에도 불구하고 르노의 경영실적은 좋지 않았다. 매월 10억 프랑에 달하는 손실이 쌓였고, 1984년에는 125억 프랑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됐다. 이에 중재를 위해 프랑스 정부가 나섰고, G.베스가 구조 개편의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급격한 경비 절감을 단행했고, 불필요한 자산들을 처분했다. 전반적인 모터스포츠 활동도 즉각 중단시켰으며, 대대적인 정리 해고를 실행하여 회사의 부피를 줄여 나갔다. 거품을 몽땅 걷어낸 1987년이 되어서야 겨우 재정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1990년대 초반 르노가 발표한 몇몇 모델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정상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생산된 차들은 안전도 부분에서 특히 뛰어나 충돌 시 탑승자의 안전도를 체크하는 유럽 NCAP 테스트에서 당시 최고 점수인 별4개를 받기도 했다.

적자에서 벗어나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르노는 F1에 엔진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윌리엄즈의 머신에 엔진을 공급한 르노는 1992~1993, 1996~1997년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1995년에는 베네통과 함께 타이틀을 안았다. 설립 초기와 비슷하게 모터스포츠의 성공은 로드카 생산 판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오랜 암흑기를 보내고 찾아온 결실이었다.

르노는 1996년 드디어 다시 정부의 규제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경영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동유럽, 남미 등으로 손을 뻗어나갈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프랑스 정부는 르노 지분의 15.7%를 갖고 있다. 어찌되었건 이 후 출시된 르노의 모델들 대부분이 큰 인기를 끌어 성장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안전성과 독특한 디자인으로 특히 유럽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1980년대 큰 위기를 겪은 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수익이 전년에 비해 43% 증대 했음을 발표한 바 있다.
르노는 각국의 자동차 회사들과 협력 관계에 있다. 르노 브랜드 그대로 해외 시장에 나서기 보다는 각 나라의 자동차 회사들을 사들이거나 협력 관계를 맺어 지역 문화에 융화되는 자동차를 생산 판매하는 것.

‘르노-닛산’얼라이언스(르노가 닛산의 44.4%의 지분을, 닛산이 르노의 15%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외에 삼성 모터스(르노 삼성)와 다키아를 산하로 두고 있고, 볼보 지분도 20% 갖고 있다. 2006년‘르노-닛산’과 GM의 접촉이 늘고 있어 현재 르노가 다시 한번 미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나 돌고 있다.

엔진 서플라이어에서 완전한 팀으로
모터스포츠가 자동차 마케팅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르노 역시 모터스포츠를 적극 활용하여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고 또 가치를 높여왔다.

특히 1970년 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 랠리, F1 등 광범위한 모터스포츠활동을 했다. 1977년 그들이 F1에 처음으로 터보차저를 탑재한 독특한 방식의 머신을 가지고 등장했을 때는 비웃음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 머신은 자신들의 홈그라운드 디종에서 곧바로 우승을 차지했고, 2년 후 F1의 모든 레이싱 팀들이 터보차저를 탑재한 머신을내놓았다.

엔진 서플라이어로만 F1에 참가하던 르노는 2001년 베네통 팀을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오랜 기간 F1에 참가해온 경험에 힘입어 그들은 재빠르게 성장했고, 2003년 헝가리 GP에서 첫 승을 거둔다. 2004년에는 2위와 간발의 차이로 컨스트럭터즈 3위를 차지했고, 2005년에는 드라이버즈 타이틀(F. 알론소)과 컨스트럭터즈 타이틀을 모두 석권한다. 2006에도 르노는 알론소가 드라이버즈 챔피언십을 거머쥐었다. 지난해부터는 오랜 동반자인 JTI와 결별하고, 타이틀 스폰서로 ING 생명을 맞아들였다.

/카라(KARA) 오토스포츠 2008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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